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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언더도그마

쥬시힐 2024. 1. 7. 20:44

언더도그마

최근 수정 시각: 2024-01-03 20:32:58
 

분류

 
1. 개요2. 유래와 의미3. 문제점
3.1. 모순점
4. 사용 시 주의점
4.1. 용어 자체의 문제4.2. 내용의 문제
5. 사회적 약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언더도그마 비판 현상6. 언더도그마의 악용과 오용 7. 주의할 점
7.1. 사회적 약자 핍박과 언더도그마의 악순환
8. 극단적인 환경결정론9. 반대 양상: 수평 폭력10. 오버도그마11. 클리셰와 현실
11.1. 클리셰의 변화
12. 사례13. 관련 어록1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류로, 약자는 무조건 선(善)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惡)하다[1]고 믿는 인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며,[2] 구체적으로는 미국에서 보수주의자가 리버럴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사회과학에서 약자를 뜻하는 '언더독(underdog)'과 맹목적인 견해, 독단을 뜻하는 '도그마(dogma)'의 합성어. 두 단어 모두 'dog'가 들어간다.[3] '언더독의 도그마(Underdog's dogma)'로 풀어서 쓰이기도 한다.

2. 유래와 의미[편집]

 
일본 드라마 <리갈 하이>의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가 역설하는 언더도그마의 문제점

'언더도그마'라는 단어는 티 파티 소속의 강경 보수 혹은 극우 인사인 마이클 프렐의 저서(#)의 제목이었다. 언더독 효과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그 전부터 미국의 우익들에게서 나왔으나, '언더도그마'라는 말은 이 책의 제목이 시초이다. 사실 '언더도그마'라는 용어가 유행어로 사용된 적은 없다. 단지 '언더도그마'라는 책이 조금 관심을 받으면서 이 책의 제목이 거론되었을 뿐이다.

본래 마이클 프렐은 친이스라엘주의자이자 베냐민 네타냐후의 적극 지지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이슬람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호적인 미국의 리버럴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대체의 내용은 '퇴행적 좌파'를 비판하는 논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언더독과 오버독의 위치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요지인데, 일례로 한때는 홀로코스트 때문에 유대인이 언더독으로 응원받았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어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언더독으로 응원받고 유대인이 되려 오버독으로 비난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다.[4] 이런 논지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선악을 논하기 힘들만큼 서로에게 반인륜적 범죄가 행해지는 관계라고 주장한다.

'언더도그마'가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에서 생겨났다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종의 어퍼머티브 액션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강자들보다는 약자들이 훨씬 더 많으므로 민주주의에서는 언더도그마가 발생하기 쉽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라 자신과 관련하여 좋으면 찬동하고 싫으면 꺼리는 경향이 있다. 입장이 변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밑바닥 출신에서 벗어난 자수성가자들이 오프라인에서나 온라인에서나 밑바닥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경우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 현실을 고려하면 약자의 입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언더도그마를 옹호하는 바탕에는 동정심이 아닌 자기보신과 이기심이 자리잡았을 수도 있다.

또한 대개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들은 스스로 권리를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도덕적 관점에서 약자를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먹히기 쉽다. 물론 사회적 강자라고 하여 권리를 항상 잘 챙기리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이들의 경우는 자신의 권력 덕분에 목숨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까지 가기는 어렵다. 사회적 약자는 편견에 따라 처음부터 유죄로 추정되어 억울하게 피해하는 경우가 있고[5], 반대 심리로 언더도그마가 생기는 것이다. 현대 미국의 리버럴 세력이 언더도그마 논리를 주장하는 것도 흑인이나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에 대한 경찰이나 사법 기관의 차별적인 법집행이 미국 사회 내에서 사회적으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기성세대들이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이유 중에는 사치스럽게 사는 모습보다는 뭔가 가난하고 불쌍해 보이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더독 포지션이 이미지를 더 수월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인식도 있다. 당장 이런 사람들 중에 인간극장이나 동행같은 류의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것이 많다.

3. 문제점[편집]

언더도그마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이성보다 감성이 더 중시되며 원칙과 절차가 유명무실해진다고 하는 점이다. 흔히 약자는 배려와 구호의 대상이 되기 쉽고 대중들은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동정과 공감을 보내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무고한 피해자이고, 누구는 억압적인 악당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판단으로 치달으면 사회 문제로 번지게 된다.

'언더도그마'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또는 'Might makes right(힘이 곧 정의다)'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때 생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형량을 낮게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곧 '가난한 사람들'(혹은 기타 '불쌍한' 사람)은 처벌을 약하게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되는 논리이다. 이를 보편화할 경우 기업가 노동자, 생산자와 소비자 등 경제 주체들을 집단별로 갈라서 탈세 등의 행정범죄에 대해 어느 한쪽에는 무거운 형량을 매기고 다른 쪽에는 적은 형량을 매겨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향하게 된다. 인신공격의 오류처럼 자신들은 절대선이고 상대방들은 절대악이라는 전제를 까는 것과도 비슷하다.

언더도그마가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여론이란 휘발성이 강하고 비이성적이며 감정적이자 쾌락주의적이고 즉흥성이 커 무계획적이고, 대두된 논제를 심력을 기울여 분석할 의욕이 저조하여 희생물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경제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거나, 정신병 등 심신미약 상태이거나, 구성원 간 갈등이 심하고 분열된 사회일수록 이런 여론이 불같이 솟아 비이성적, 감정적인 언더도그마로 이어진다.

언더도그마 현상이 비대화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하면 포퓰리즘같은 광기로 얼룩진 사상이 등장한다.[6] 이러한 사상들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고 하는 점에서 언뜻 민주주의의 정당한 실행으로 보이나, 실체를 들여다보면 대중의 감정에 따르는 정책 남발로 국가의 안정성을 깨뜨리는 이른바 '떼법'으로 불리는 기존 제도의 개악, 악법의 입안, 사법기관의 독립성 훼손(이하 사법 문단)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수가 있다.

실제로 언더도그마가 사회에 끼치는 폐해는 크다. "너희 강자들은 가진 것도 많은데 1~2개 피해 좀 생겼다고 뭘 징징거리냐?"라든지 "가난하고 불쌍한 약자한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니, 눈물도 없습니까?" 같은 호소가 당연시되면 사회가 정해진 규칙대로 잘 굴러갈 리가 없다. 이는 양 극단인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로 둘 다 옳지 않다. 시민의 권한이 커지고 있는 근현대로 올수록 언더도그마 정서가 사회질서를 흔들어 놓기 쉬워진다. 과거에는 물리적 폭력, 즉 파괴공작, 폭행, 지배계급원을 대상으로 한 집단린치, 저격 및 암살 등으로 이루어진 혁명만이 시민이 사회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나, 법치주의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스마트폰 보급과 1인 미디어 시대가 진행되는 오늘날에는 시위, 연대발의, 개인 방송, 단톡방, 전자 민원만으로도 기존 올바른 법제도와 규정을 뒤흔들고 죄 없는 인물을 망가뜨릴 수 있게 되었다. 언더도그마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일수록 그 공동체는 존속의 명분과 가치를 잃고 마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의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거나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무리를 짓고 죄 없는 자나 대상에게 사적제재를 가하고 이를 광장에 게시하여 자부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에 심취한 시민들의 이런 광적인 행보는 사회를 퇴보시켜 결국 국가 전체를 파멸로 이끈다.

3.1. 모순점[편집]

정의로운 자 강강약약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이런 시점이 언더도그마의 결정적 원흉이 되었다. 이들 논리대로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에게는 벌하고 약한 자에게 대할 때는 자애롭게 대하는 게 강강약약인 것인데, 악행은 강자들만 하고 선행은 약자들만 한다는 보장은 이들의 논리와 달리 절대로 못 한다. 애초에 그런 의미가 아니면 다른 단어도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의 정의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사실상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해당 정의 비판을 신성모독으로, 강약약강에서 조금이라도 부정적 요소를 지우려고 하는 사람을 악마 숭배자로 여기는 셈이다.[7]

게다가 강강약약이 정의이고 강약약강이 불의라고 못을 박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전자에는 부정적 요소를, 후자에는 긍정적 요소를 넣는 것을 싫어하는 점이다. 즉, 반항 하극상은 강강약약에 넣기 싫어하고 상명하복 예절은 강약약강에 넣기 싫어한다는 뜻.[8] 이러면 그 사람들은 '공평'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만이 그렇게 해석한다는데, 강자를 무조건적 악으로 치부하거나 악인을 무조건적 강자로 판단해버리는 것이 과연 공평한지를 생각해 보자. 잘못된 길에서도 이를 비판했다.

또한, 이들의 논리와 다르게 행동하기도 하는데, 몇 가지 예가 있다.
  • 중대(中大)기업 상품은 되도록 사지 말고 소(小)기업 상품을 많이 사는 게 옳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등으로 대기업의 비싼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 노년은 그 사람이 튼튼해도 반드시 노약자로 여기며 청년 이하는 그 사람이 아파도 절대 약자로 여기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믿음 자체가 정직한지도 생각해 보자. 어떤 약자를 상냥하게 대하다가도 그 약자가 자신보다 세지면, 또는 어떤 강자를 나쁘게 보다가도 그 강자가 자신보다 약해지면 태도를 쉽게 바꿀 수 있는가?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것이 정의라는 마인드가 있었고, 그것 탓에 현재 래디컬 페미니즘의 행태, 학생의 교권 침해 등으로 이어졌음에도 정의를 잃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마인드를 포기하지 못해 사태가 커졌다. 상대가 약자여도, 또는 강자이다가 몰락해 약자가 되어도 마음속에서 선심이 갑자기 우러러 나올 가능성이 없으며, 이 때문에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 같은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비슷하게 '약자를 보호하라'는 명분을 내세운 시위대원들이 정작 자신들보다 더 약자인 전의경들[9]에겐 단지 앞길 막는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10] 자기 편이 아니라고 그 약자를 강자로 모는 것이다. 관련 표현으로 '감탄고토', '악은 악으로'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할수록 더 악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이기적 욕망에 싸여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혼란스럽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혼란이 점점 더한 건 과거 사악한 집단으로 여겼던 자본가나 기득권층이 직접 만나보면 상당히 젠틀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낄 때다.

화가 나서 미치겠다. 문제는 지금 그들이 창업자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아니라 2세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성장 과정에서) 꼬인 게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착하다. 그러니까 더 화가 나는 거다. 예전엔 못 가지고 무식한 사람들이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다는 것.

빈부의 격차가 인격이나 인성마저도 그렇게 비틀고 있다. 어떻게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할지 참 답답하다. 『말』을 보면 운동권 내부에도 참 비리와 문제가 많은 것 같고……참으로 진실이 뭔지 혼란스럽다.

영화감독 박찬욱, 2003년 2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 중에서 진보 진영에 대한 쓴소리를 해달라는 기자의 물음에 길게 침묵하다 꺼낸 말.

프리모 레비의 수기 "이것이 인간인가"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당시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는 독일인이 유대인을 핍박한 사례만 있는 것도 아니라 수감된 같은 유대인 사이에서도 핍박이 벌어졌다고 했다. 즉, 수감된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의 차이가 발생하였고 서로 착취하였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배급이 지체되지 않도록 손목에 새겨진 번호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늦었을 때 먼저 온 수인의 무자비한 폭행에 당했다고 했다. 'La zona grigia(회색지대)'라는 그의 표현처럼, 아무데서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창업을 해 본 사람들은 알고 있듯이 세상은 흑백 둘로만 나뉜 게 절대로 아니다. 약자라고 다 착한 것은 것은 아니며, 반대로 강자라고 다 악한 것도 아니고, 약하다 해도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 앞에서는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다.[11] 사회 최하층인 아Q도 자기보다 약한 아녀자들을 패고 다녔다.

대표적으로 과거는 노동운동을 한 대학생들이 이러한 것을 겪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위장취업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실제 노동자들의 모습에 환상이 와르르 깨지며 큰 충격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했다. 노동운동가 출신[12] 정치인 은수미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실제 사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13] 그런데 저 사례처럼 아예 실력까지 속이고 들어가는 거는 화이트칼라에서도 대놓고 쌍욕박는다. 개씨부랄만 들은 게 양반일 정도로.
은수미(은): 그 동네가 원래 공장에 시다로 들어가면 절대 미싱사를 안 시켜줍니다. 그래서 메뚜기를 하게 되는데, 다른 공장에서 시다 하던 아이들이 미싱사로 바로 들어가는 거죠. 저도 나이도 속이고 미싱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 미싱을 한번 시켜 보더니 바로 하는 욕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이런 개씨부랄년...”
공장에서는 바로 알아본 거죠. 나이도 어리고 생긴 것도 어리고 미싱도 시원찮으니까 다른 공장에서 시다 조금 하다가 미상사입네 하고 들어온 걸로 알아본 거예요.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오거나 그런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평생 그런 욕을 들어온 처지이지만 저는 평생에 처음 그런 욕을 들어봤어요.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물음(물): 원래 처음 들어본 욕은 기억에 남기 마련.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심한 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신 것 같다.

: 그러면서 하루 종일 내가 여기에서 뭐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즈음에 우리 집이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삼층집이었어요. 아무리 집을 나왔어도 부모님께 미안하니까 두어 달에 한 번은 집에 가거든요. 그게 너무 생소한 거예요. 그 동네에서 길에 나서 다녀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보이는 거죠.
왜 이 동네는 이렇게 다를까 하는 겁니다. 그런 생소함에 적응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어요.
거기다가 학교에서는 항상 노동자는 정의롭고 항상 옳고 그런 것처럼 얘기들을 해요. 너무 모르는 얘기죠. 정의는 개뿔...

-이 부분,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를 접하게 되면서 겪는 중요한 충격이다. 특히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는 정의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를 하지만 그걸 듣고 배운 사람들이 겪는 충격은 상상외로 크다. 노동자는 결코 정의의 화신 따위는 아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생활인들일 뿐이다. 그들의 생활환경과 그들의 용어는 거칠고 투박하다. 노동의 정의는 그들의 말투나 습관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장에서는 항상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오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불량을 내면 머리채 잡고 싸우고, 불량을 니가 냈냐, 내가 냈냐 하면서 싸웁니다. 그걸 또 회사가 이용을 해요. 누구는 급여를 더 주고, 누구는 급여를 덜 주고 하죠.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일을 하면서도 급여를 서로 모르게 합니다. 그렇게 차별을 해요. 제 시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아이인데 무슨 일인지 무단 결근을 했어요. 그러고 다음날 나오게 되면 그냥 마구 밟아버립니다."

: 때린다는 얘기인가?

: 그냥 때리는 정도가 아니에요. 실제로 구두발로 마구 밟아 버립니다. 그걸 나름대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온 저도 그냥 옆에서 바라 볼 수밖에 없어요. 말릴 힘이 없죠. 그러고 나서 또 일을 해야 해요. 저도 해야 되고 맞은 아이도 퉁퉁 부어서 또 일을 해야 됩니다. 그저 빨간약이나 좀 발라주는 거죠. 그 장시간 노동을 그렇게 맞아가며 해야 되는 거죠.

: 드디어 민중의 삶의 현장을 목격하시는 건가?

: 미싱사 선배들은 얘길 합니다. A급 미싱사가 되려면 손톱이 세 번 빠져야 된다고. 저도 한 번 겪어 봤는데 기계식 미싱에 드르륵 하면서 바늘 손톱을 관통한 거죠. 그 때 반장이 뛰어옵니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게 당연한 거죠.
반장이 오더니 하는 말이...
“야, 이 멍청아, 옷감에 피 묻잖아..”
-매우 순화시킨 표현일 것이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러면서도 그냥 손가락을 싸매고 빨간약 바르고 또 일을 하는 거예요. 폭력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참는 게 아니라 그냥 저항할 생각 자체를 못하는 거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거고, 적응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사람들은 참 무력하구나..."


심지어 강강약약이 정의라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하다간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서 정작 어느 누구도 시행할 생각조차 않고 (자신 기준으로 강강약약의 )반대 행동인 강강약강/강약약강 행위 및 이 행위가 (자신과 몇몇 사회상)상명하복, 예절이라는 합리화를 하면서 그저 누가 해주기만 바랐다.[14] 본인들도 정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정의를 바란 것. 이 정도면 넓은 관점을 가져서 차라리 예절 강약약강으로 수긍하면 되지만, 이미 부정적으로만 써야 한다는 단어에서 그걸 수긍하겠다는 건 이 단어를 욕으로 보지 말라는 뜻과 같다.[15][16] 이들의 정의대로 실행하는 것이 자승자박이기도 하다. 이들 기준의 상대적 약자에게서 똑같이 당할 수도 있는 것. 자신들의 호의를 정작 다른 약자들이 권리로 여기든지...

결국 강강약약이 정의이고 강약약강이 불의라는 이유는 자신이 정의라고 여기는 약자라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니 이 두 단어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예외사항이라고 배제할 수밖에... 인간도 결국은 자신의 이권, 이득을 위해 노력하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일 뿐인 셈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서민, 하층민 출신임을 강조하거나 선거철에 소위 '민생 탐방', '민생 체험'을 하는데, 전통시장에 방문하여 시장상인과 악수하고 노점 음식을 사 먹는 등을 가리킨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슬프면서 웃기는 사실인데, 절대다수의 국민에게는 저 행위들이 일상의 한 부분이니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 사소한 행위들을 구태여 굳이 체험해도 정치를 더 잘 하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언더도그마와의 관련성보다는 지지 유세 목적으로 자신을 찍어달라고 홍보하는 성격이 강하며, 정치인은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고, '민'도, '생'도 없이 자신이 서민의 애환을 잘 아는 것처럼 선거철에 일회성 쇼를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뭘 해도 무근거하게 욕하는 사람은 욕할 것이라 정치인 입장에서 안 한다는 선택을 하면 끝이니 한다는 선택만 남아 과연 일회성 쇼이기만 할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4. 사용 시 주의점[편집]

4.1. 용어 자체의 문제[편집]

현재의 '언더도그마' 비판론과 유사한 논리는 전부터 존재했다.[17] 하지만 '언더도그마'라는 용어는 미국의 한 강경 보수 저자의 책 제목일 뿐이다. 학술적 용어는커녕 미국에서 유행어로도 자리잡은 적이 없다.

이 문서로 리다이렉트되는 '레미제라블 콤플렉스' 역시 실체가 없는 표현이다. 실은 신림동 고시촌에서 생겨난 용어인데, 사람마다 표현이 조금씩 달랐다. 강사별로는 '늙은 노모'로 부르기도 했다. /사례 문서의 기타 사례에서는 행정법에서 트럭 운전수의 면허 취소 판례를 다루고 있는데, 배경 지식이 없이 판례들이 나열되어 있는 문제가 있다. 이를 설명할 목적으로 발명된 용어이다. 그래서 '늙은 노모'로도 부르는 것.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였는데, 고시원의 행정법 강사들은 전부 온정주의와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판례가 출제됐을 때마다 피보라가 이는 현실에서는 저것들을 언급하는 수밖에 없던 모양이다. 이후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 대항한 표현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사례가 추가되면서, 원래 문서가 만들어진 이유가 된 사례는 구석 한켠으로 밀려나버리고 정치색을 가지게 되었다.

또 다른 리다이렉트인 '동정 과잉' 역시 한국어 사전에도 없고,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사례도 발견할 수 없다. 비슷한 것은 'Hyper-Empathy Syndrome' 정도이나, 이건 정치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질환을 말하는 것이다. # 아마 이 용어를 한국어로 억지로 번역해서 '동정 과잉'이라는 표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논리학에서 말하는 '동정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나왔거나.

실제로 검색해 보면, 마이클 프렐의 책 제목으로서 거론된 경우나 관계 없는 고유명사로 거론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100% 한국에서 사용된다.

1. 영어 위키백과에는 Underdogma 문서 자체가 없다.

2. Quora에서는 단지 5건 정도의 질문글 제목에서만 'Underdogma'가 검색된다. 또한 답변도 대부분 사용률이 극히 적다고 말한다. 예시1 예시 2 게다가 이 질문글 중 다수는 비영어권 사람의 질문으로 보인다(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

3. 레딧에서는 단지 4건 정도의 글만 'Underdogma'를 거론하고 있으며, 그 글은 모두 프렐의 책의 제목을 인용하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논한 것이다.

4. 어반 딕셔너리에 항목이 있기는 한데(#), 추천수와 비추천수가 매우 적다2022-07-07 기준 18/3). 어반 딕셔너리의 다른 유행어 항목들이 가볍게 1000 단위를 넘기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 정도는 그냥 개인이 끄적인 정도에 가깝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각종 출처를 검색해보거나 직접 미국인들에게 문의해 봐도 '언더도그마'라는 용어가 유행어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단지 마이클 프렐이 동명의 책을 쓰자 그 책의 서평 등이 쓰이면서 이 용어가 조금 거론되었을 뿐이다. 이 책은 특정 성향의 지지자들에게서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아주 유명한 책이으로 보기도 힘들다. 사실 한국에서도 프렐은 처음 '언더도그마'의 조어자로 알려지다시피 한 인물이다.[18]

'언더도그마'라는 용어가 유행어로 사용되는 국가는 한국뿐이며 프렐의 책에 대한 서평 밖에 '언더도그마'라는 키워드로 언론에서 쓴 기사는 한국에서만 여럿 나온다.[19] 사실 나무위키에서 보면 현지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항목으로 작성된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어느 정도는 그 용어를 밀어 준다는 의미도 있고,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쓸 공간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물론 일단 책 제목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 같이 완전한 문헌오염은 아니긴 하다. 이 용어의 유행은 나무위키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20] 이 용어가 급속도로 특정 계층에게서 널리 사용된 2010년대 이후는 한국 사회에 유행하는 특정한 정치적 성향이나 감성적 성향[21]이 '언더도그마'라는 신조어와 잘 맞아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유사 신조어들과 달리 영어로 되어 있고 뭔가 학술적 용어처럼 느껴지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이 용어가 많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22] 나무위키에서 조금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항목이나 서술들에 '언더도그마' 항목이 계속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그 기폭제였다.

게다가 프렐이 이 말을 한 것도 특정한 주제(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한 것이지, 온갖 분야에 다 적용하기 위하는 것이 아니다.[23]

참고로 나무위키의 이 항목은 처음 개설되었을 때 사법(판결 등)과 의료[24]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다가 자신이 비판하고 싶은 대상을 '언더도그마'로 규정하여 비판하는 서술들이 계속 추가되어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25]

4.2. 내용의 문제[편집]

순수하게 논리적 의미에서 '언더도그마'에 대한 비판론과[26], '언더도그마 비판론'을 펴는 사람들[27]이 주로 주장하는 사례들은 별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측면으로 극히 편향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후자의 사람들이 제시하는 언더도그마의 사례가 원래의 정의(定義)와 큰 관련이 없으며 그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억지로 연결시켜져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미러링(신조어)처럼 그 말뜻 자체는 혐오표현이 아니지만, 실질적인 맥락에서는 혐오표현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볼수도 있다.

또한 '언더도그마' 비판론을 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특정 분야에서는 '언더도그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피해자성',' 피차별성'을 강조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즉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에 대해서만 '언더도그마'라는 프레임을 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8] 따라서 이 신조어, 유행어는 객관적인 토론에 사용될 수 있는 학술적 용어가 전혀 아니며,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강하게 띄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담으로 흔한 오해지만,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같은 구좌파가 '언더도그마'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언더도그마'적인 태도는 완전히 구좌파적 이념과 반대되며, 이론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 사회주의 권력자들을 봐도 약자는 선할 것이라는 동화같은 사고방식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개인의 심성 같은 것에 의존하는 것은 사회구조를 강조하는 좌파들과 어울리기 힘들다. (주체사상같은 이상한 거라면 모를까)

사회주의자들이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은 기본적인 정의론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계급적 착취구조를 비판하기 때문이지, '피지배계급이 착해서'가 아니다. [29] 웹툰 송곳에 나온 선한 약자가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시시한 약자가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들의 정통적 사고방식을 아주 잘 보여준다.

5. 사회적 약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언더도그마 비판 현상[편집]

반인륜 범죄 사건이 보도될 때, 가난하거나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네티즌들이, "가난하다고 범죄자가 된다면 나도 살인자가 되어야겠네", "나도 어렵게 살았지만, 저런 헛소리하는 인간들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며 더욱 더 비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의 언더도그마 혐오. 이들은 범죄가 많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범죄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기 때문에, 저소득층 중에서는 오히려 범죄자들에게 관용과 연민을 베풀지 말고 강경처벌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30] 고통받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가난하고 자시고 굳이 봐줘야 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하다.

이 밖에도 일부 빈곤층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일부 여유있는 계층이 언더도그마를 보임으로써 반감으로 인해 빈곤층 전체를 예비 범죄자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빈곤층들 절대다수의 입장에선 범죄 안 저지른 자신들도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되니 언더도그마에 반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럭저럭 일부 여유있는 계층이 갖는 이상주의에 입각한 언더도그마를 오히려 서민, 빈곤계층에서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그들이 안전한 곳에 있어서 현실을 모른다는 식의 반감.

특히 생계형 절도사건이 알려질 때면 여유있는 계층에서 한다는 소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절도를 저지르겠냐는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면 빈곤계층에선 가난해도 범죄 안 저지르고 사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인데 그 절대다수에 속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전부 바보들이냐며 언더도그마를 보이는 이들을 욕하는 일이 많다.

당장 평민들은 굶는 게 익숙했던 고대에도 보면 가난하다고 해서 도적이나 해적 등 범죄에 가담한 경우는 소수였고, 절대다수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빈곤하다 해서 범죄자를 동정받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전장연 시위로 인해 장애인들이나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 가운데 전장연 때문에 자신들도 단지 장애인 또는 장애인을 가족으로 뒀단 이유만으로 전장연과 똑같은 취급 받을까 봐 불안하다며 전장연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는 의견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래서 전장연은 같은 장애인들이나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한테서도 의외로 동조받지 못하고 되려 비판받는 입장이다. 오히려 전장연 옹호자들 중 장애인 및 그 가족들보단 비장애인들 중에 더 많이 보일 정도.

인천 장발장 사건 당시 당사자의 추악한 실체가 알려지기 전에는 생계형 절도라면서 술은 왜 훔쳤냐는 주장들에 대해 가난하면 술도 못 먹냐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고, 이래서 빈곤층들이 언더도그마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그 밖에도 원래부터 언더도그마를 비판해온 사람들의 목소리 또한 커졌다. 생계형 절도를 동조하는 걸 넘어서 배를 채우는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술을 훔친 것마저 동조해버리니 정말로 기가 찰 일이던 것이다.

상술했듯이 빈곤층이 절도를 저지를 때 무엇을 훔쳤는지는 보지 않고 그저 빈곤층이 절도를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동정하고 옹호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로 인해 똑같이 빈곤해도 범죄 안 저지르는 사람들의 비판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여유있는 계층에서도 언더도그마를 비판해온 사람들 입장에선 언더도그마를 보이는 이들에 대하는 비판 명분이 더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6. 언더도그마의 악용과 오용[편집]

약자를 선의로 여기는 마음을 악용하여 사기를 치거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곧 자신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지만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칭하면서 언더도그마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닫힌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경우는 막상 따져보면 그 지역의 강력한 권력층이지만 자신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나 부유한 지역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이므로 이러한 범죄를 봐줘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흑산도 집단 성폭행 사건, 섬노예가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가해자들 모두 상당수 큰 규모의 염전을 운영하는 부농이다. 그러므로 이는 언더도그마라고 볼 수 없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려는 지식인, 학자들에게서 약자의 범죄는 생존을 위하는 몸부림,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식으로 마땅한 해결책 없이 무마되거나[31], 약자의 범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된다. 또한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려 매장된다.[32]

이러한 문제 때문에 사회에 만연한 약자 혐오가 확대재생산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언더도그마의 반대로, 약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그 범죄자가 속한 특정한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하는 혐오와 연결되는 역사깊은 경향이 존재한다. 이런 논리에서는 약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악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이민자 혐오, 미국에서의 흑인 혐오, 산업혁명시기 도시빈민 혐오와 같은 것들이 있으며, 자세한 예로, 18-19세기즈음의 영국에서는 도시빈민들이 구원되지 못할 죄악의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동화에서는 인간의 선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두 모습을 잘 말해주지 않아 어린아이들이 이러한 언더도그마에 쉽게 빠지기도 한다. 이는 편향 가운데 생존자 편향과도 비슷하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나오는 초기 충녕대군의 모습이 이러는 어린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33]

6.1. 목구멍이 포도청[편집]

가난이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완전히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범려의 일화처럼 가난하거나 가난을 겪은 적이 있는 이들은 리스크를 감수하거나 투자를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가난한 자들에게 국한된 용어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과 생존을 위해 침묵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이다. 대표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부조리에 침묵하는데 쓰인다. 해당 문서에 적어진 예시도 사장의 갑질과 범죄에 침묵하는 직원들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소설 레 미제라블의 메시지는 생계형 범죄를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다. 고위층의 범죄는 묵인되면서 가난하거나 힘없는 자들의 범죄는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과, 옛날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편견을 가진 것을 비판한 것이다. 팡틴이 공장장의 부당한 성적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짤리고 이곳저곳에서 일을 구하지 못해 결국 성매매를 하게 되고 그 죄로 감옥에 간다. 반면에 공장장이와 팡틴의 친척은 오랫동안 아동학대와 폭력 등 수많은 범죄를 자행하지만 처벌받지도 않는다. 장 발장은 감옥에서 나와 주교를 만난 후는 회개하고 시장이 된 인물이다. 장 발장이 도주한 이유는 자베르가 자신의 과거를 밝힐까 봐 두려워서이며, 도주했음에도 숨겨둔 어음과 돈으로 파리에서 부자로 살았다. 참고로 마리우스 코제트와 만난 곳은 장발장이 후원한 빈민구제소였다.

생계형 범죄는 그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용인된 적이 없다. 판례는 단 1,000원의 횡령도 횡령이라 판시하여 해고의 정당성을 용인했다. 흔히 알고 있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형 범죄를 봐주는 경우는 그 피해액이 적고 피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사면을 청구하는 경우일 뿐,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사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들의 범죄를 허용한다거든 같은 환경에서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조차 범죄로 유입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다.

7. 주의할 점[편집]

청소년 범죄의 주된 배경 요인은 환경이 아니라 도덕성 결여라는 조사 결과도 영국에서 나왔다. 링크
24일 영국 데일리메일 인터넷판에 따르면 케임브리지 대학교 범죄학연구소가 피터스버러에 거주하는 약 700명의 청소년을 10년 동안 연구 관찰한 결과, 도시 환경이 일부 청소년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도덕성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략)
이 연구를 이끈 퍼-올로프 위크스트롬 교수는 "많은 젊은이가 '범죄혐오적'이며 범죄를 '할 수 있는 행동양식'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기회가 도둑을 만든다, 즉 젊은이들이 특정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범죄를 저지른다는 생각은 우리 연구결과와는 배치된다"고 그는 단언했다.

이 연구결과대로라면,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절도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평소 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행동 양식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영국 폭동의 경우는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차브족들이 일으켰다는 통념과는 달리 그저 재미로 가담한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도 상당수였다.

한편, 치안의 수준에 따라 집값이 크게 달라지는 걸 생각한다면, 가난한 동네에 범죄율이 높은 것을 단지 주민 수준 탓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즉, 범죄자들이 싫지만, 그 지역을 떠날 형편이 안 되어서 억지로 참고 사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수도 있다. 다만 원래는 안 그랬던 청소년이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단지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가난한 동네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할 환경이 아니라서, 청소년기의 울분이나 호기심을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할 기회가 부족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금기시되는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스릴과 쾌감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다양한 문화적 체험은 자신의 진짜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이 우범 지대에서 성장했다면, 자신이 복싱 천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조폭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실제로,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슨의 사례에서 보듯이, 비행 청소년이 우연히 훔친 악기를 계기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34]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문화적 환경과 도덕적인 분위기가 정착되지 않았다면, 이를 음주, 폭력, 절도, 마약 같은 데 탕진할 수 있고, 사고를 칠 때마다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기도 쉽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 중 사고를 치는 사람들만 언더도그마를 내세운다는 점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차림새만으로는 빈부를 쉽게 알 수가 없으므로, 본인 입으로 가난하다고 말을 꺼내기 전에는 남의 가난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부자가 평상시에 검소하게 사는 경우도 많아서 몸에 지닌 물건만으로는 경제적 상황을 짐작하기가 어렵다.[35]

따라서 평소에 환경 탓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난은 겉으로 드러날 일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분수에 맞게 돈을 쓰기 때문에 가난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빚을 만들지 않으려 하며, 빚이 있어도 성실하게 일해서 갚는다. 이렇다 보니 저소득층 중에 일부러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하는 부류들만 눈에 띄고, 사고 안 치고 성실히 살아가는 부류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저소득자의 범죄율이 중산층이나 고소득자보다 높다는 것이, 중산층, 고소득자가 평균 이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는 견해도 있다. 단지 교양과 교육을 통해서 세련되어질 기회가 있었던 것이고, 순간의 화를 풀고 나서 잃을 게 더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도 평범한 사람들의 평생 수입을 그냥 받을 정도의 집안이라 그런지 의외로 상당히 예의를 차릴 줄 알았으며, 히로히토 덴노도 귀족적이라 다른 천민 출신 전범들과 다른 개념인으로도 보이지만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의 민간인들에게도 직접 자살령을 내렸다.[36]

부유층 자제가 성격, 사교성이 훨씬 좋다는 내용 또한 굉장히 주관적인 논리이다.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서 당장 타인을 공격하지 않을 뿐이다.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특권이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타인을 배척하는 경우도 허다하며, 갑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돈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못한 이들을 다 아랫것 취급하며 무시하고 막 대하는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차별하는 경우라 볼 수 있다. 휴거라는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다. 부자병이라는 현상도 있다.

잠원동 묻지마 살인사건처럼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심지어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던 사람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흔히, 없는 사람들이 잃을 게 없어서 막나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사건의 경우처럼, 미국 유학을 했을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괜찮고, 학벌도 나름 괜찮음에도, 일이 잘 안 풀렸을 경우, 그 좌절감이 분노로 바뀌어 최악의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처럼, 학력과 경제적 수준이 높은 경우, 눈높이가 높기 때문에,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차라리 못살고 공부를 못하면, 내가 능력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다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소확행에 집중한다. 이 사건의 범인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전과자 되지 않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게 그래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례는 고학력의 유복한 집안 사람들이 인성이 좋다는 인식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다.

은수미 의원 사연을 위시한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나타내는 부분도 주의해서 봐야 한다. 노동운동 또는 인권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 전체를 더 이롭게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개개인들의 인성이 정의롭거나 도덕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용되었던 부의 격차가 범죄를 유발하는 점만 봐도, 경제적 격차의 해소는 각종 범죄지표의 하락을 가져올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계층간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면 그 정치구조는 약해지기 쉽다. 부의 독점은 항상 소수가 하기 되고, 나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부를 독점한 집단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이다. 이런 경제구조가 건강할 수 없는 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공산국가. 들고 일어난 가치는 평등이지만 현실은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부패가 심각하고 경제적인 격차가 크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패망했다. 2020년 기준 중국이 강력한 국력의 공산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자본주의를 일부 받아들이기 전엔 어림없는 일이었다. 노동운동의 필요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득을 보는 집단에 대한 감정적인 혐오감이 그 필요성을 반감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언더도그마에 너무 심취해서 약자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도와주기 싫다는 식의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도 언더도그마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성적이지 못할 수 있다.

7.1. 사회적 약자 핍박과 언더도그마의 악순환[편집]

'언더도그마'는 위에 적혔듯이 맹종(dogma)을 말한다. 즉 전후사정과 세부사항을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약자니까 가난하니까 면책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꼴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권,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범죄면책권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물론 몇몇은 도덕률에 따라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익을 좇아 움직이기에 범죄를 마음대로 저지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언더도그마가 사회적 약자의 범죄를 양산하고, 이러한 범죄는 결국 사회적 약자 기피, 혐오로 이어이며 다시 이는 이들 핍박으로, 그리고 다시 언더도그마가 심화되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 된다.

2010년대 중반부터 사회적 약자들의 막장 행각을 비난하는 글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널리 퍼지고 있다. 물론 이 글들의 대부분은 확인할 수 없으며, 검증되지 않았고, 주관적, 개인적 경험으로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막장행각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글이 널리 공감을 얻는다고 하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가난혐오, 약자혐오가 팽배한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혐오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과 고아는 범죄를 많이 일으킨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과거부터 존재했기에 최근 만들어진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이전판만 하더라도 불편한 진실 문단에서 가난한 자가 더 범죄를 많이 일으키며 고아들이 범죄자가 많다는 주장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그저 감정에 호소하거나 단순관찰 결과, 추론을 근거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고아 중에는 범죄자가 많다는 주장이 그러했다.[37] 고아이므로 사랑을 못 받기에 스토킹 범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한 예시로 김유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예시이지 모든 고아가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결핍에 빠져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은 너무나도 다양해서 부모라는 존재가 있든 없든 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이가 있는 반면, 부모라는 존재에 크게 기대하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38]

사실, 2011년 영국 폭동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남 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어도 어차피 사고 칠 사람은 일을 저지른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뭐하러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판하기 때문에 애초에 언더도그마를 악용하기는 어렵다.

즉, 진짜 문제는 문제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아니라, 그런 사람으로 인해 피해를 봤을 경우에, 사태 수습이 어렵다는 것이다.

불우한 사람 중에 언더도그마를 악용하는 사람과 엮이게 될 경우,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가 어렵고, 특히, 그런 사람이 겪은 불우함의 정도가 일반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만큼 피해의식도 심해지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넌 네가 싫냐라고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한다. 다만 이는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만 드러내는 본색이며, 그 이외 사람들에게는 소심하고 착한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네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만해서 불쌍한 사람을 품어주지 못한다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할 수도 있다.[39] 특히, 스토킹처럼 과거엔 범죄시되지 않았던 일탈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한때 여초 커뮤에서 자주 언급됐던 김유정의 스토킹 일화도, 김유정의 친구가 피해자인 박녹주 명창을 너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주 입에 오르내린 것이다.

지금도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스토킹을 할 경우, 가해자의 동성친구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저 일화가 꾸준히 언급되어 온 것이다.[40]

그래서 가난한 집 아이나 한부모 가정 아이와 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경우에는 본인이 과거에 그런 사람들에게 당했다든지, 경찰과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일을 하면서 언더도그마가 거짓이며 가난한 자가 더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식의 서술이 많았다.

문제는 순수한 동심을 이용하여,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를 나쁜 어른들이 범죄에 이용하는 경우다. 성인인 마이클 잭슨도 그런 사람에게 걸려 들어 평생을 고통에 시달렸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쉽게 특정 카테고리에 우겨넣고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피하라는 무식한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가 쉬운 것이다.

사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애들이 어린 동생들을 키우는 소년소녀가장이 많았다. 물론 대다수는 그럼에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기성세대들은 자식이 탈선할 때 이런 분들의 사례를 들면서 자식을 꾸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과 사돈을 맺는 것을 꺼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41]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본인이 아무리 떳떳해도 가족 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구성원이 한 명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년소녀가장 본인은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일지라도 동생들 중 한 명이 사고를 친 적이 있을 경우, 이게 혼사에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불우한 환경으로 인한 집안의 결혼 반대는 우리나라의 소위 막장 드라마에서 갈등 장치로 즐겨 사용하는 소재이다.

물론 멀쩡한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 더 악질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좋은 환경이었어도 저리 되진 않았을 것이라며 가해자를 동정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라 피해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고, 결국 이를 계기로 피해자는 되도록이면 불우한 사람과는 마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피해자 입장에서는 저럴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통계적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일이 터진 후 피해자가 도리어 비난받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도 과거 공동체 문화가 발달했던 시절에는 반상회 등으로 이웃과 활발히 교류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 눈이 무서워서라도 탈선을 하기 어려웠고, 만약 엇나가는 사람이 동네에 있을 경우 때려서라도 바로잡았다.[42] 하지만 신도시가 늘어나면서 지역 구성원들이 외지인들인 사례가 일반화되자, 이웃끼리도 잘 모르고 지내는 일이 많아져, 이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다만 통계적으로는 요즘이 오히려 더 탈선을 안 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뭉쳐서 집단범죄를 행하거나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가해자들 마음대로 자신들을 용서하는 경우가 많았다.[43] 옛날에는 공동체 정신 같은 것들을 강요하던 선생들부터가 이상한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학교에서도 지금보다도 더 어메이징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일탈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다니기가 쉬워졌다.

이 때문에 오히려 201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가난 혐오가 커뮤니티를 통해 번진다. 특히 기혼자가 많은 주부 커뮤에서 저런 이야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생하며 살다가 인성이 나빠질 확률도 많고, 아이에게까지 불행을 물려주니 가난한 사람은 아예 애를 갖지 말라거나, 심지어는 원룸에 살면 애를 낳지 말라는 글까지 올라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용어 '언더도그마' 자체의 오남용 사례도 많아졌는데, 용어의 사용 사례가 증가하면서 그에 수반하여 오남용 사례도 함께 늘어난 것이다. 사회과학 용어인 '언더독 효과'와는 달리 학술적 용어에서 출발한 것도 아닌지라 이념적 혹은 정치적인 프레임에 근거하여 특정한 메시지를 담기 좋은 용어였기 때문에 오남용이 늘어난 면이 있다.

8. 극단적인 환경결정론[편집]

중요한 것은 언더도그마이든, 이에 반발하여 약자를 혐오하는 오버도그마이든 간에 양쪽 모두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경결정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에 심취할 경우 초반에 바로잡아야 할 유년기, 청소년기의 일탈도 바로잡지 못해서 더 큰 문제를 낳고, 앞서 언급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핍박을 더욱 강화한다.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환경과 상관없이 어차피 문제를 저지를 사람은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 오죽하면 직장인들 사이에서,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해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은 못 피한다는 얘기가 왜 회자되겠는가?

게다가 사회적 약자를 애초에 배제하는 것도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탈북자를 들 수 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약자에 대한 혐오감에 빠진 사람들이 이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고 배척하는 혐오 발언을 쏟아내지만,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을 무슨 수로 막을 것이며, 만약 탈북자 혐오를 내세우는 정치인이 등장했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9. 반대 양상: 수평 폭력[편집]

'수평 폭력'이란 현실에 대한 분노, 특히 자신보다 강한 입장에 대한 이에 대한 분노를 자신보다 약한 자 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푸는 현상을 말한다. 언더도그마와 그 기제는 다르나, 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10. 오버도그마[편집]

소위 '감성팔이'나 '무임승차'의 폐해를 겪어 염증이나 피로감, 거부감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언더도그마를 아예 극혐하는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늘었고, 특히 2010년대 이후로 가난혐오와 맞물리면서 일각에서는 언더도그마를 비판하기 위해 가난 = 악, 부자 = 선이라는 '오버도그마(Overdogma)', '탑도그마(Topdogma)' 같은 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수평 폭력' 개념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상술된 것과 같이 수평 폭력은 강자가 다른 강자에게, 약자가 다른 약자에게 저지르는 폭력이며 강자나 기득권이 무조건 더 선하다고 믿는 개념이 아니다.

이 점에서 오버도그마나 탑도그마의 전형에 해당하는 사례로 일단 '명문대생이 더 도덕적일 것이다'나 '부자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더 도덕적일 것이다'와 같은 선입견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사례는 현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범죄자 이근안의 재판과정에서 그의 깔끔한 필체를 본 재판관들이 '이런 바른 글씨를 쓸 정도로 학식 있는 사람이 고문과 같이 야만적인 행위를 했을 것 같지 않다'며 그에게 유리한 판단을 했다는, 차마 믿기 힘들지만 엄연히 필기로 남아 있는 선례가 존재한다. 이뿐만 아니라 각종 범죄나 도덕적 지탄을 받는 행위에 대해 이런 식으로 지엽적인 요소만 보고 '이렇게 점잖은 사람, 또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이 설마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겠냐'는 식의 감성팔이 변호는 언더도그마의 예 못지않게 수두록히 찾아볼 수 있다.

또는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 및 고정관념에 얽매여 맹신하는 경우나 다수결의 원칙을 곡해하여 다수의 의견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선하다, 또는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 역시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오버도그마, 또는 탑도그마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서 역시 각각의 사안을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다수성이나 소수성, 또는 대상의 강함이나 약함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언더도그마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고, 단지 그 방향이 바뀌어 있을 뿐이라는 비판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언더도그마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언더도그마' 개념의 오남용 사례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자 쪽에 명확히 잘못이 있음을 지적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책임과 비판을 희석시키기 위해 '언더도그마를 경계해야 한다'고 양비론으로 물타기를 하는 것. 이 역시 '수평 폭력'보다는 (가칭) '오버도그마', 또는 '탑도그마'로 해석하는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

주의할 점은 언더도그마를 비판하면서 이 오버도그마에 빠지지 마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선과 악은 가난과 부유함과 상관이 없는 점인데, 언더도그마를 비판하면서 가난한 자는 악이고 부자는 선이라는 극단적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해야지, 단순히 돈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다.

11. 클리셰와 현실[편집]

불쌍한 사연이나,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동정하는 것. 이를 악용하여 싸구려 동정심을 얻으려고 사람들을 자극하는 예로 언론플레이가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흔히 나온다. 공격측이 악이고 방어측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인 것.

처벌의 측면에서 보면 같은 범죄 행위로 말미암아도 고소득층은 더 주목받지만 저소득층보다 훨씬 적게 처벌 받는데, 이는 고소득층 인식 악화로 이어지고... 악순환이다. 위에서 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사례들은 신데렐라 등의 고전부터 시작해서 막장 드라마까지 역사적으로 대부분 매체의 클리셰로 등장한다. 가령 가난한 주인공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나오고,[44] 부자들은 각종 부정이나 비리, 범죄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가난한 주인공을 구박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매체에서는 고소득층 범죄자와 그를 심판하는 경찰을 묘사하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45]

그러나 이는 연민에 의거한 논증을 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은 약하다고 해서 꼭 선하지는 않다는 것. 현실에서 고소득층의 범죄율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범죄율보다 상당히 낮은 편이다. 대기업은 임금체불같은 그들 입장에서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데, 리스크 - 리워드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우파'란 단어가 탄생한 이유도 약자인 민중이 강자인 귀족보다 미개해서 차라리 귀족과 타협하자는 부르주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46]

막장 드라마의 악녀들 중 왔다! 장보리 연민정, 뻐꾸기 둥지 이화영, 이브의 사랑 강세나, 내딸 금사월 오혜상 네 사람 모두 태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출신인데,[47]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언더도그마적 시점으로 볼 때는 그들의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악행'까지 미화되고 심지어 그들로 말미암은 피해자 비난이 나올 위험성이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 중에서 천민 출신 친일파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이러한 논란에 휘말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인데, 아무리 조선 말기까지 양반들이 천민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자수성가한 천민들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역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던 양반들을 괴롭히는 것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 않냔 게 시청자들의 시각이다.

물론 무조건 사회적으로 생리적 쓰레기니까 색안경을 끼는 게 옳다는 말도 아니다. 애초에 강자가 정의라는 논지도 옳지가 않다. 강한 것이 곧 선이면 강자들이 하는 일은 모두 정당하다는 뜻인데, 그러면 강자들이 부당하게 휘두르는 횡포나 폭력을 설명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강자들의 횡포가 야기한 온갖 문제들이 그 강자들을 몰락시킬 수도 있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또한 분명히 가난해도 착하고 바르게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많으니 이는 '약자=악인' 논리가 옳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범죄자가 불쌍하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근거로도 곧잘 활용된다.[48]

무소유이냐 풀소유이냐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소유한 것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게 사회에도 이롭고 우월의식을 덜어내는 데에도 좋다. 그 돈을 자기 명품 소비에 쓰는 것보단 말이다. 그리고 사회에는 오히려 별로 못 가졌는데 알바생에게 갑질하는 사람, 풀소유이지만 매너가 더 좋은 사람도 있다. 물론 이때는 풀소유인 사람은 어차피 자신이 우등하니 알바생의 태도가 공손하지 않아도 너그럽게 넘어갈 여유가 있을 수 있고, 귀차니즘에 알바생과 다투면 본인의 격이 떨어진다 생각해서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평소에 사회에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알바생의 태도가 공손하지 않으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어린애들마저 자신을 무시한다는 괜한 자격지심에 열폭하여 난동을 부릴 수도 있다.

고대 서양의 최고 철학자인 플라톤의 대표적 저서 국가론에서는 돈이 많은 걸 장점으로 꼽았는데, 플라톤도 악이나 범죄가 어느 정도 경제적 궁핍함에서 기인한다고 알고 있던 셈이다.[49]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라 아시아의 정치인이자 중국 최고의 명재상이던 관이오도 "일단 백성이 배부르고 곳간이 가득 차야 그 다음 예절이나 부끄러움 같은 걸 생각하게 된다."라며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고, 영화 유튜버 발없는새도 비슷하게 영화 기생충 스포일러 리뷰에서 일침으로 비판했다(#).[50] 곧, 강자가 어떻든 그 대상을 악마화해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도 하며,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같은 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의 원흉이기도 한 셈이다.

11.1. 클리셰의 변화[편집]

하지만 2010년대 국내 창작물들이 극단적인 사이다만을 바라는 레파토리가 심화되면서 액션이나 스릴러의 주인공들의 상당수가 정의감을 던져버린 이기주의적 성향을 보여주고, 스스로 갑질하거나 악행을 저지르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클리셰는 완전히 뒤바뀐 추세이다.[51][52]

특히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감시를 거의 받지 않는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영화조차도 범죄도시의 흥행에서 보듯이, 윤리성을 구애받지 않는 통쾌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53]

상위 문단에 적힌 클리셰 이전에는 이런 클리셰도 있던 듯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악당이 더욱 번성하는 수가 많고,[54] 현대 소설에서는 그것이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존중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뻔한 리얼리티가 싫었고, 그 무렵의 유행이던 '어둠과 악의 승리'라는 결말에 식상해 있었다.

악당은 수갑을 차라. 그런 단순하고도 정직한 느낌으로 지금 발표된 것과 같은 결말을 선택했다.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개정판에 추가된 작가의 말

12. 사례[편집]

  자세한 내용은 언더도그마/사례 문서
 참고하십시오.

13. 관련 어록[편집]

이 사람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잊으려고 마약을 복용한 것입니다. 재판장님께서도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잘 아시잖습니까? 저는 이 사람이 비록 마약을 복용하기는 했지만,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55]

출처: 위기철의 논리 3부작
너희는 또한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

출애굽기 23장 3절 (공동번역)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내가 버마에서 얻은 신념은 모든 피억압자는 선하고 모든 억압자는 악이라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의 밑바닥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줘 보세요. 누구나 역경(adversity)을 견딜 수는 있지만 오직 위대한 한 사람만이 성공(prosperity)을 견딜 수 있습니다. 자비의 측면에서가 아니면 결코 권력을 남용하지 않은 것이 링컨의 위업입니다.

로버트 잉거솔[58]

14. 관련 문서[편집]